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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갈 시간도 없는데 공짜 노동까지…의료기관 노동자 인권 '적신호'

등록 2018-03-20 15:35:03 | 수정 2018-03-21 12:05:05

보건의료노조, 전국 54개 병원 1만 1662명 대상 대규모 조사 결과 발표
"2018년은 태움·공짜노동·속임인증·비정규직 아웃 운동 원년"

보건의료노조가 20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의료기관 내 심각한 갑질과 인권 유린 실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뉴스한국)
최근 간호사가 노출이 많은 의상을 입고 야한 춤을 추거나 '열정페이'라며 적은 임금만 받은 사건이 사회적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일부 병원의 돌출 행동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현장에서는 전국 의료기관에서 이 같은 문제가 비일비재하다는 지적이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이하 보건의료노조)은 20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두 달여 동안 진행한 '의료기관 내 갑질과 인권 유린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설문 조사 결과는 병원 노동자들의 인권 침해와 노동권 침해가 만연한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보건의료노조는 지난해 12월 18일부터 지난달 24일까지 전국 54개 병원에서 일하는 조합원 1만 166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였다. 응답자 직종은 간호사가 7703명(66.1%) 가장 많았고 의료기사(1970명·16.9%), 사무행정(718명·6.1%), 간호조무사(648명·5.6%) 순으로 나타났다. 국내 5대 병원 중 보건의료노조가 있는 서울 성모병원과 서울 아산병원도 실태 조사 대상이 됐다.

이번 실태조사에서는 시간외 근무의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났다. 노동 시간보다 일찍 퇴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사례는 간호사(5437명·70.6%)에게 가장 많이 나타났다. 간호조무사(288명·44.4%)와 의료기사(821명·41.7%)도 10명 중 4명 이상이 이런 문제를 경험했다. 심지어 업무 시간 외에 체육대회·송년행사·환자위안행사 등에 참여하고도 수당 신청 자체를 아예 하지 못한 사례는 전 직종의 26.3%에 이른다.

게다가 병원 노동자들은 자신의 업무 외에 부당한 업무도 수시로 강요받는 것으로 드러났다. 의료기관 인증 평가를 할 때 청소, 환경 정리, 풀 뽑기, 침대 닦기, 주차 관리, 담배 꽁초 줍기 등 업무를 어쩔 수 없이 했다는 경우가 51.5%에 이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휴게시간은 허울에 불과하다. 근로기준법은 하루 8시간 노동시간을 기준으로 4시간마다 휴게시간 30분을 보장한다. 현실은 전혀 딴판이다. 병원 노동자 중 휴게시간을 100% 사용하는 경우는 15.8%에 불과했다. 특히 간호사 사정이 가장 열악했는데 휴게시간에 쉰다고 응답한 사람은 6.1%다. 92.2%는 휴게시간을 일부만 보장받거나 전혀 보장받지 못한다고 밝혔다. 정해진 식사시간을 충분히 보장받는 경우는 모든 직종에서 25.5%로 나타났다. 간호사 직종에서는 31.1%가 식사시간을 보장받지 못한다고 응답했다.

'태움'이 대변하는 감정노동과 직무 스트레스 실태도 위험 수준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태움이란 간호사 사회에서 상대방이 불에 타 재가 될 수준에 이르도록 괴롭히는 것을 말한다. 간호사 40.2%, 간호조무사 18.7%, 의료기사 15%가 태움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병원 노동자의 직무스트레스는 74%로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이 가운데 간호사는 83.3%로 다른 직종에 비해 직무 스트레스가 가장 심했다. 간호조무사(63%), 의료기사(55.2%), 사무행정(54.8%)이 그 뒤를 이었다.

병원이 노동자들에게 지급해야 할 물품을 주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환자 안전을 중요하게 여기는 병원이 비용을 아낀다며 의료진에게 장갑이나 마스크를 제대로 주지 않거나 지급하지 않은 사례를 경험한 사례는 19.1%다. 각종 비품과 물품을 개인이 사게 하거나 부서 회비로 구입하도록 하는 이른바 '비품 갑질'도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무용 비품을 구입한 경험은 간호사가 54.3%로 가장 많았고 간호조무사 34.4%, 의료기사 29.6%, 사무행정 29%였다. 이들이 사비로 구입한 것은 파쇄기, 복사기, 건전지 등이며 복사기 대여료를 지급한 경우도 있다. 심지어 환자 치료에 필요한 의료용품을 부서 회비를 걷어 구입한 경우도 있는데, 간호사 직종이 53.6%로 가장 많고 간호조무사(17.9%)와 의료기사(6.9%)가 뒤를 잇는다. 회비로 구입한 것은 병원이 직접 구입해야하는 체온계, 드레싱세트, 펜라이트, 과산화수소, 이동용 산소포화도기계 등 의료기구다.

병원 노동자들이 겪는 갑질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병원이 직원 의사와 무관하게 특정 정치인의 정치 후원금을 납부하도록 강요한 적이 있다고 응답한 사례는 10.1%에 이른다.

나순자 보건의료노조 위원장은 "설문조사 결과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심각한 상황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며, "보건의료노조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올해 전면적인 일터 혁명에 나선다. 병원 노동자가 안전하게 일할 때 병원이 안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보건의료노조는 '환자 안전 병원·노동 존중 일터 만들기 4아웃'운동을 시작한다. 4아웃은 의료기관에 만연한 태움·공짜노동·속임인증·비정규직 4가지를 완전히 근절하는 운동을 말한다.

여기에는 지난달 15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박선욱 간호사의 이름을 딴 이른바 '박선욱법 제정' 계획도 들어 있다. 박 씨는 서울아산병원에 신규 간호사로 입사한 지 6개월 만에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정재수 보건의료노조 정책기획실장은 "박 씨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병원 신규 간호사 교육 제도를 전면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법률을 제정할 것"이라며, "신규 간호사 교육을 의무 제도로 하고 교육 시스템과 교육 훈련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한편 교육에 필요한 재정 지원을 골자로 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보건의료노조는 올해 상반기 고용노동부의 근로 감독 및 근로 조건 개선 사업에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데 이날 발표한 실태 조사 결과를 활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슬 기자 dew@newshanku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