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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91살의 ‘광복군’, 나라 잃은 아픔 뼈에 새긴 작은 태극기

등록 2015-12-12 00:01:13 | 수정 2015-12-14 15:22:21

애국지사 김영관 할아버지, 역사의 페이지에 녹아든 삶의 기록

태어났을 때는 이미 나라를 잃은 뒤였다. 1910년, 일본은 ‘한일합병조약’을 명분으로 대한제국을 장악했다. 하늘과 땅은 그대로였지만 그 사이 민중의 삶은 일장기에 억눌려 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애국지사 김영관(91) 할아버지는 1924년 9월 15일 경기도 포천 영평에서 태어났다. 일본의 지배가 일상인 시대에 나서 보통학교·중학교를 나오고 사범학교에 들어갔다. 일본의 착취와 차별은 공기처럼 햇빛처럼 한반도를 가득 메웠다. 압제는 불가항력적이었고 잔인하고 지독했다. 망국의 슬픔이 삶을 집요하게 갉아 먹었다. 설움과 고통은 어딜 가더라도 피할 수 없었다.

애써 지은 농사는 모두 일본의 차지였다. 쌀의 이동은 금지 당했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교사는 유배처럼 먼 학교로 쫓겨났다. 일본은 한국 사람을 제압할 때 한국 사람을 이용했다. 높은 직위는 일본인이 차지하고 말단에 한국인을 배치해 앞잡이 노릇을 시키고 한국인을 못살게 굴었다. 이한제한(以韓制韓) 수법이다. 어린 시절 김 할아버지의 마음속에는 일본에 대한 거부감이 자리 잡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마음은 커졌다. 일본에 대한 무언의 반항으로 상투를 자르지 않던 증조할아버지가 일본인에 의해 머리카락을 잘리는 모습을 보며 그는 ‘일본과는 상종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 풍문으로 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다짐’
김 할아버지는 중학교 시절 친구들과 어울리다 중국 충칭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정)가 있다는 풍문을 들었다. 임정의 존재를 알았다고 해서 당장 뭘 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다. 다만 그때 마음속에 ‘내가 망국의 백성은 아니구나’하는 자존심이 서릿발처럼 고개를 들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김 할아버지는 경성사범학교(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진학했다. 일본을 위해서 싸우는 일만은 피하겠다는 마음으로 선택한 진로였다. 당시 일본은 교원 양성을 위해 사범학교 학생의 입영을 면제했었다. 13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지만 김 할아버지는 입학한 그 해 9월 입영 통지서를 받았다. 일본이 지원병이 부족하다며 1924년생을 시작으로 징병제를 시작했던 것이다.

1944년 9월 20일 입대한 김 할아버지는 함흥에서 한 달 동안 훈련을 받았다. 일본군으로 싸우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던 그는 불현듯 스치는 생각을 부여잡았다. 중국 충칭에 임정 있다는…. 이때부터 그의 목표는 오로지 임정 광복군에 입대하는 것이었다. 광복군은 임시정부 정규군으로 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조직됐다. 그의 속을 알 리 없는 한 일본인 장교는 명문고를 나와 명문학교에 들어간 그에게 일본 육군 소위로 임관할 것을 제안했다.

한 달 간의 훈련이 끝나고 자대 배치를 위해 열차에 몸을 실었다. 중국으로 갈지 다시 남쪽으로 내려갈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일본군은 일개 한국인 병사에게 한 치 앞의 미래도 알려주지 않았다. 열차가 출발한 후에야 목적지가 중국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인지는 가늠할 수 없었다. 보름 가까이 이동하는 열차 안에서 그는, 일본군을 탈출해 광복군을 찾아 갈 계획을 세우는 데 정신을 쏟았다. 열차는 중국 저장성 의오역에서 멈췄다. 항주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온 지역이었다. 탈출을 약속한 다른 한국인 소년들 몇몇이 있었지만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일본군의 지휘 아래 뿔뿔이 흩어졌고 인사도 없이 허망하게 헤어져야 했다.

그는 의오 남서쪽에 있는 동양에서 훈련을 받는 동안 더 치열하게 계획을 세웠다. 고민과 수정을 반복하며 계획을 마음에 새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변 정황을 살피는데 주력했다. 당시 중국에는 모택동의 팔로군과 장개석의 국부군 그리고 일본이 중국 남경에 세운 괴뢰정부의 군대도 있었다. 일본은 중국의 주요 해안 지대를 점령했지만 오지까지는 접수하지 못했다. 그 깊숙한 지역의 도시는 왕징웨이가 일본과 화평을 선언하고 세운 괴뢰정부를 통해 장악했다. 김 할아버지는 훈련을 하며 정세를 살피고 지형을 익히며 부대 주변 상황을 파악했다. 괴뢰군의 초소와 장개석 군의 위치를 각인했다.

김 할아버지는 군에서 만난 한국인 동료들과 슬쩍 슬쩍 이야기를 나누며 탈출 의사를 타진했다. 그러던 중 탈출 날짜를 결심하고 함께 가기로 한 동료들과 최종 일시와 도주로를 공유했다. 두 명은 찬성했지만 다른 두 명은 ‘탈출 생각이 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며 미뤘다. 그들은 탈출조에서 빠졌다.

감시를 피해 탈출
김 할아버지는 훈련을 받거나 내무반 생활을 할 때 일본인 동료로부터 일상생활을 감시당했다. 처음에는 일본인 동료가 김 할아버지를 잘 따르는 것인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며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원천 차단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탈출하기로 한 날을 기다리고 있는데 무슨 낌새를 챘는지 상부의 움직임에 날이 서기 시작했다. 삼엄한 경계 탓에 이미 한 차례 탈출 기회를 놓친 후였다. 김 할아버지는 또다시 탈출을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 디데이를 12월 3일 일요일 저녁 식사 후로 잡았다. 다른 두 명과 만날 1차 접선지점과 시각, 도주 방향을 확정했다.

김 할아버지가 속한 부대는 본부에서 떨어져 주변 보안이 철저하지 않았다. 중대 본부는 주변에 이중으로 철조망을 쳐두었지만 김 할아버지가 지내는 내무반은 민가를 개조한 것으로 주변 철조망도 흉내만 낸 정도였다. 부대를 빠져 나올 적절한 시점을 모색하면서도 평소와 다름없이 움직이느라 극도로 긴장했다. 긴장했지만 자신감을 잃지는 않았다. 탈출에 실패하면 총살형이었다. 목숨을 건 일이었다.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자신감 밖에는 기댈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자신감을 지탱하는 것은 뼈에 새겨진 나라 잃은 한이었고 일제의 실정에 대한 분노였다.

탈출하며 가져갈 필수품을 전대에 차고 외투를 걸친 후 저녁식사가 차려진 2층으로 향했다. 김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2층에 올라가자 대기하던 병사들이 습관적으로 돌아봤다. 순간 식은땀이 흘렀다. 김 할아버지가 자리에 앉고 평소와 같이 식사를 시작했다. 그날은 붉은 팥밥이 나왔다. 일본에서는 축하할 일이 있을 때 붉은 팥밥을 먹는 풍습이 있었다. 팥밥을 보며 김 할아버지는 속에 자신감이 생겼다. 마치 탈출 성공을 미리 축하하는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친 후 탈출할 시각이 다가왔다. 병사들이 중대 본부로 이동해 목욕을 하는 사이 미리 약속한 돌다리 밑으로 조용히 이동해 탈출할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고베고상(神戶高商) 출신 일군 병사가 목욕을 같이 가자며 들러붙었다. “속이 나쁘고 감기에 걸려서 못 가겠다”고 하니 “네가 안 가면 나도 안 간다”며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는데, 아무리 뿌리쳐도 고베고상 출신 병사는 미동도 않고 옆을 지키고 섰다. 김 할아버지는 최후의 수단으로 화장실에 간다며 개울 옆 임시 변소로 향했다. 위아래가 뻥 뚫리고 가운데만 거적으로 열고 닫는 허술한 구조였다. 변소에 들어가 막사를 보니 그는 방호벽에 얼굴을 올려두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에서 속이 바싹 바싹 타들어갔다. 5분 정도 지났을까 거적을 조금 걷어 방호벽을 보니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김 할아버지는 이 때다 싶어 변소에서 뛰쳐나와 돌다리로 향했다. 만나기로 했던 한국인 병사 둘이 안절부절 서 있다 화들짝 놀랐다. 김 할아버지는 “일단 뛰어라 목표는 저 산 밑이다”는 말을 하고 곧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달리면서도 모자는 주머니에 깊이 찔러 넣었다. 증거가 남으면 뒤를 밟힐 수도 있었다. 저 쪽에 괴뢰 중국군 초소가 보였다. 그 초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넘어야 했다. 도랑을 따라 가다 둑을 기어오르고 논바닥을 달려 안전한 산 밑에 도착했다. 그 곳에서 일본군 막사를 보니 허연 석회가 칠해져 있는 벽이 보였다. 일본군 막사는 안개 속에서 조용했다. 일본군 입대 두 달여 만이었다.

광복 후 김 할아버지는 중국 상해에서, 일본군에서 함께 탈출하려다 포기했던 오래전 동료를 만난 적이 있다. 동료는 “너희들이 탈출에 성공할 줄 알았다면 같이 갈 걸 그랬다”며 후회했다. 이 동료의 말에 따르면 김 할아버지가 탈출한 후 사흘 동안 중대장이 중대원들을 동원해 막사를 중심으로 이웃동네까지 정찰했다고 한다. 그리고 병사들에게는 ‘세 놈을 저 곳에서 발견해 총살로 즉결처분했다. 너희들은 절대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잘하라’고 협박하는 동시에 담배와 과자를 주며 탈출에 대한 마음을 무디게 만들었다고 한다.

광복군, 죽을망정 포기하지 않은 길
그렇게 가까스로 일본군에서 탈출했지만 본격적인 고생은 그 때부터 시작했다. 임정을 지원하는 중국군의 도움으로 광복군까지 가는 여정을 시작했지만 과정은 생사를 넘나드는 극한의 연속이었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청년이 감당하기에는 적잖은 고통이었다. 김 할아버지 일행은 물 때문에 차례로 풍토병에 걸렸다. 맨 마지막으로 병에 걸렸던 김 할아버지는 열이 40도까지 올라 온 몸에 있던 이가 시커먼 보리쌀처럼 죽어 후드득 떨어졌다. 당시 밤에는 마구간에 지푸라기를 깔고 외투를 덮고 잤던 터라 이가 온 몸으로 파고들었었다. 식사도 여의치 않았다. 두터운 돼지비계로 낸 기름에 야채를 볶아 밥과 함께 먹었다. 하루에 두 끼를 먹는데 그나마 아침에는 미음과 꽈배기가 전부였다. 부실한 음식 탓에 체력이 떨어지니 풍토병을 이길 힘이 없었다. 약을 먹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광복군이 말하는 광복군

대한민국 정부가 김영관 할아버지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뉴스한국)
김영관 할아버지는 광복군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에 몸과 목숨을 바친 노고를 인정받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라의 독립을 이끈 그의 이름은 ‘김영관’이 아니라 ‘애국지사 김영관’이다. 지난해까지 광복군동지회 회장을 역임했다.

김 할아버지와 인터뷰는 4시간이 가까이 이어졌다. 아흔이 넘은 노구였지만 그는 광복군이 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일본군을 탈출했던 과정과 광복군으로 활동하며 새겼던 독립 의지를 조금도 상실하지 않고 생생하게 들려줬다. 김 할아버지가 역설했던 ‘광복군의 역할’을 옮긴다. (카이로선언과 관련한 설명 중에는 기자가 추가로 덧붙인 부분이 있다.)

“광복군이 무슨 일을 했는지 말하겠다. 혹자는 광복군은 특별히 한 일도 없고 전투를 한 적도 없고 그저 뒤에서 밥만 먹고 앉아있었던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아까 말한 것처럼 긴장의 연속이었고, 나는 광복군의 역할과 의미를 여덟 가지로 요약해 말하겠다.

첫째, 우선 역설적으로 이것을 생각해보라. 만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광복군이 없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해방한 후 연합군이 한민족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처리했겠나. 광복군은 임시정부를 뒷받침하는 힘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군이었다. 국군이 없으면 정부도 존재 가치가 없는 것 아닌가. 둘째, 임시정부가 남의 나라에 있었지만 독립정부로서 행사했다. 광복군도 중국군에 예속하지 않고 독립정부의 국군으로서 임시정부의 통수권 하에 있었다는 게 중요하다.

셋째, 카이로선언(1943년 11월 27일)에 영향을 줬다. 카이로선언을 발표하기 전 중국 장개석은 한국이 독립할 능력이 있다고 강조하며 연합국 대표를 설득했다. 처칠 영국 수상은 반대했지만 카이로선언에는 ‘한국인민의 노예상태를 유념해 적절한 시기에 자유와 독립될 것을 결의한다’는 조항이 생겼다. 카이로선언은 국제사회가 한국의 독립을 처음으로 보장한 것이다. 장개석의 한국에 대한 신뢰와 믿음은 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거에서 출발한다.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홍커우공원(현 루쉰공원) 일왕의 생일잔치와 승전 축하식이 열리는 자리에 윤 의사는 물통 폭탄을 던졌고 시라카와 일본 상해사령관 등이 목숨을 잃었다. 윤 의사의 상해의거는 죽어가는 임시정부를 살려 놓는 동시에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시켰다. 정치적 분열을 겪던 임시정부는 상해의거를 계기로 전환점을 마련하며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됐다. 장개석은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하는 데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17일 정규군으로 광복군을 조직했다. 상해의거에서 임정 그리고 광복군으로 이어지며 카이로선언에 영향을 준 것이다.

넷째, 광복군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1941년 12월 10일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 선전포고를 했다. 다섯째, 연합국(미·영)과 협동작전을 수행했다. 여섯째, 국내외 국민들에게 희망을 줬다. 일곱째, 나라 안팎에서 이리 저리 갈라져있던 세력을 한데 모아 탄생한 것이 광복군이다.

여덟째, 나라는 망했지만 군맥, 군대의 맥은 끊이지 않았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했다. 하지만 이후 의병이 되고, 독립군이 되고, 광복군이 되면서 군대의 정신은 끊어지지 않았다. 군맥이 이어졌으니 나라도 계속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광복군은 해방 후 국군의 모체가 되었다.”

인터뷰를 끝내며 김 할아버지는 반드시 기억해 달라며 한 마디를 남겼다.

“나라 잃은 원인을 알아야 되풀이 하지 않는다. 파당 행위·부패·국제 정세 둔감·국민들의 무관심 때문에 나라를 잃었다. 다시는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


이슬 기자 dew@newshanku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