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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간호사 파독과 동백림 사건의 산 증인 이수길박사 증언Ⅱ

등록 2007-04-05 11:07:13 | 수정 2007-04-05 11:07:13

“1967년 동백림 간첩단 사건의 진상을 밝힌다”

1966년 가난하던 시절, 꽃다운 나이의 한국의 젊은 여성들이 ‘백의의 천사’라는 이름으로 독일 병원에 취업하는데 산파역을 맡았던 이수길 박사. 간호사 파독과 관련된 일을 접고 다시 학문에 열중하던 어느 날 갑자기 간첩이 되어 중앙정보부원에 의해 납치된다. 모진 고문 끝에 무혐의로 풀려나기는 했지만 그는 동백림 간첩단 사건을 평생 잊지 못한다.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독일에 돌아온 그는 본인과 가족의 신변 안전을 위해 독일에 귀화했다. 이 박사는 오랫동안 과거사를 가슴에 묻어두고 살아왔다. 그러나 그의 나이 79세, 이제 지난 이야기들을 양파 껍질 벗기듯 하나씩 하나씩 벗겨내기 시작했다. 그는 말한다. 시대가 달라진 것이 분명한 것 같다고.재독한인(이하 재독) : 그 동안 공안사안에 대해 침묵을 지켜 오다가 사실을 밝히기로 심중의 변화가 오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었나.

이수길 박사(이하 이수길) : 1993년에 제1회 KBS 해외동포상 사회봉사부문을 수상하게 되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수상자들을 부부동반으로 모두 청와대로 초청했다. 그 때 배석해 있던 공보수석이 뜬금없이 대통령에게 이 박사가 동백림 사건으로 고생을 참 많이 했다고 말을 꺼내자 대통령이 관심을 보이며 당시 사건을 물어보기에 그 때 일을 설명했다. 내 이야기를 다 들은 김 대통령은 “다음에는 그런 일이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래서 용기를 얻었다. 그 다음부터는 마음 놓고 말할 수 있었다.

이영자 여사(이하 이영자) : 그 전에는 얘기하지 못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만 해도 겁이 나서 말을 못했다. 묻는 사람도 없었지만…
(참조 : 동백림 간첩단 사건은 1967년, 독일과 프랑스로 건너간 194명에 이르는 유학생과 교민, 예술인, 지식인 등이 동베를린의 북조선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고 간첩교육을 받으며 대남적화활동을 했다고 주장, 혐의자들을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강제로 납치해서 대한민국으로 연행하여 재판에 회부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은 정부가 정치적 목적으로 사실보다 부풀린 사건으로 판명되었다. 이들 중에는 작곡가 윤이상과 화가 이응로, 황성모 교수도 포함돼 있었다. 국제법을 어기면서까지 불법으로 자행된 이 사건으로 당시 서독정부는 국교단절도 단행하려고 할 만큼 외교문제로 비화되었다.

1967년 12월 3일 선거 공판에서 관련자 중 34명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으나 대법원 최종심에서는 간첩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자는 없었다.동백림 사건에 대한 중정의 수사착수는 당시 박 대통령이 1967년 5월 17일 대학교수였던 임석진 씨와의 직접 면담을 통해 ‘고백’을 들은 직후라고 진실위는 밝혔다. 박 대통령은 당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철저히 수사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진실위는 “우방과 주권침해 시비를 가져올 연행을 최소한 대통령에게 보고, 승인 받지 않고 중정 독자적으로 추진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말해 박 대통령이 수사착수 지시 뿐 아니라 불법해외연행 사실을 사전에 알고도 묵인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했다.)재독:동백림 간첩단 사건 연루자로 납치를 당하게 된 일부터 소상히 설명해 달라.

이수길:대사관에 근무하는 양두원 참사관이 어느 날 정보부 사람들하고 ‘마인츠’ 우리 집으로 날 찾아 왔다. 서로 아는 사이라 사전연락 같은 것은 없었고 그냥 인사차 온 거라고 했다. 같이 온 사람 중 한사람만 초면이었다. 내 처가 해준 밥을 먹고 양 참사관이 2차를 가자고 해서 마인츠와 가까운 ‘비스바덴’으로 가서 한 잔 하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내 차로 앞장을 설 테니 내 뒤를 따라 오라고 하니 “그러지 말고 한 차로 갑시다” 하기에 정보부원 3명과 함께 양 참사관 차를 타고 출발했다. 그런데 당초 가기로 했던 비스바덴으로 가지 않고 ‘빙엔’ 방향으로 가기에 왜 이쪽으로 가느냐 했더니 “촌스럽게 비스바덴으로 가지 말고 바트 노이나하로 가자”는 것이었다. 그곳 카지노에서 한 시간 가량 룰렛을 하면서 놀았다.밤 12시쯤 되자 그 사람들이 “지금 바로 마인츠로 되돌아 갈 수 없으니 일단 대사관으로 갔다가 마인츠로 데려다 주겠다”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런데 대사관에 도착해 보니까 어느 틈엔가 동행했던 양 참사관과 일급 차장은 없어져 버렸다. 그리고는 그날 처음 알게 된 정보부원이 날 데리고 대사관 건물의 다락방 노무관실로 안내해 주었다.
(참조 : 당시 독일의 수도는 본이었고, 대한민국 주독 대사관도 본에 있었다. 양두원 참사관은 대사관에 파견 근무하던 중앙정보부원으로 현재 국내에 거주하고 있다. 비스바덴은 헤센 주(州) 주도로 마인츠와 인접해 있다. 빙엔은 마인츠에서 북쪽으로 15km 정도 떨어진 라인 강변의 전경이 아름다운 관광도시다. 바트 노이나하는 마인츠와 본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휴양도시로서 카지노가 있다.)

20~30분가량 후에 그가 다시 들어오더니 나에게 다짜고짜 하는 말이 “당신 북한에 갔다 왔지? 이북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으니 나하고 한국에 좀 가자”는 것이었다. 놀란 마음을 추스른 나는 “지금 한국에 갈 수 없다. 4월 1일부터 마인츠 방사선과에서 새로 공부를 시작했고 지금 아무 말 없이 가버리면 난 해고된다. 그럼 내 처하고 아이 둘을 누가 먹이냐. 난 못 간다.” 그렇게 항변했다.
그러자 그는 뺨을 때리고 욕하면서 담뱃불로 내 얼굴을 지지려고 했다. 그것도 부족해서 내 지팡이를 뺏어들더니 사정없이 패기 시작했다. 그의 매질을 손으로 막다가 결혼반지가 깨져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고 이 손가락(왼손 가운데 손가락을 보이며)도 그때 맞아서 굽었다.

결국 한국에 가겠다고 하자 다른 수사관이 들어와 입가에 피를 닦아주며 “그러게 진작 간다고 하지 괜히 고집 부리다가 얻어맞기만 하지 않았냐”고 하더라.아내에게 연락도 못하고 다음 날 아침 7시쯤 대사관을 나와 함부르크 공항으로 향했다. 운전자, 정보부원과 나 이렇게 셋이었다. 가는 동안 지팡이, 와이셔츠, 넥타이 등을 새로 사 주었다. 내 지팡이는 나를 때릴 때 부러졌고 옷과 넥타이는 피로 얼룩져 입을 수 없었다.
함부르크 공항에 가보니 함부르크 총영사를 비롯해서 독일 사람도 상당수 나와 있었다. 그들은 내가 왜 끌려가는지 알고 있는 듯했다. 정보부원이 아무소리 하지 말라고 경고를 주었다. 말하면 죽는다고 위협을 가했다. 임시여권도 어느 틈에 다 만들어 놓았다. 그 여권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그들이 알아서 탑승 수속을 했고 나는 그냥 따라갔다.일본 하네다 공항에 도착해서 하룻밤 자고 그 다음날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에 도착하자 바로 앰뷸런스에 태워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학생기숙사로 불리는 중앙정보부 이문동 분실로 끌려간 것이다.

재독:당시 이 박사 단독연행이었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도 함께 강제 송환되었나.

이수길:독일에서 모두 16명이 납치되었는데 대체로 한 번에 3~4명씩 데리고 나간 것 같다. 내가 끌려 갈 때는 쾰른에 사는 배준상과 기센에 사는 최정길, 그리고 나 이렇게 세 명이었다. 배 씨는 법학박사이고 후에 귀국해서 대학 교수를 지냈다. 최 씨는 작곡가 윤이상 씨가 한국에서 공부시킨다고 데리고 온 사람인데, 최 씨의 부친과 윤 씨는 친구사이로 윤 씨가 북한에 갔을 때 최 씨의 부친을 만나 남한에 있는 그의 아들을 독일에 데려다 교육하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배 씨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중국식당에서 박정희 대통령 욕을 했다가 이 말을 들은 임석진 씨가 밀고해서 잡혀가게 된 것이다.재독:이 박사의 혐의사실은 무엇이었나.

이수길:당시 동백림 사건 조사위원회가 작성한 나에 대한 혐의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내가 북한이 포섭한 간첩이라는 혐의였고, 다른 하나는 내가 공공연히 공산주의를 찬양하여 반공법을 위배했다는 점이었다.
전자에 대해서는 프랑크푸르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 몇몇이 이북을 가보니까 이수길도 이미 포섭되어 있더라는 말을 근거로 한 것이고, 후자에 대해서는 내 경험을 들은 사람들이 사실을 와전해서 나를 음해한 것이다. 이 같이 억울한 일 때문에 정보부에 붙들리게 되었다.
내가 북한에 포섭된 인물 운운하는 것은 나 보다 먼저 잡혀간 사람들이 만들어 낸 말로 내 알 바 아니다. 그런데 북한 찬양설은 한 가지 사건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어느 해 겨울인데 박사학위를 마무리하고자 베를린에 다녀 올 일이 있어 운전을 하고 가는데 갑자기 눈이 많이 왔다. 눈길에 차사고가 났는지 앞차가 브레이크를 밟기에 나도 따라서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그만 미끄러져 펜스에 꽝 부딪쳤다. 타이어 두개가 펑크 나서 마침 지나던 사람들이 경찰을 불러주어 동독경찰관이 왔다.
경찰관들이 직접 나서서 바퀴 하나는 스페어타이어로 바꿔주고 다른 하나는 근처 포츠담에 가서 바람을 넣어가지고 와서 끼워 주었다. 감사해서 수고비를 주려고 하니까 인민을 위해 당연한 일을 한 것이라며 사양했다.
이 일을 후에 임석진, 정규명 씨 등에게 말한 적이 있는데 그 얘기를 전해들은 정보부는 마치 내가 공산당을 찬양한 것처럼 둔갑시켜 반공법 위반으로 잡아넣으려 했다. 웃기는 일 아닌가. 그러나 그 시절에는 가능했다.

또 프랑크푸르트에 사는 간호사들에게 이북 잡지가 배달되는 일이 자주 있었다. 나는 독일 경찰에 이 책은 불온서적이니 배달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달라고 신고한 적이 있었다. 정보부에 끌려갔을 때 내가 빨갱이가 아니라는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 사실을 진술했다.정보부에서 독일 대사관에 확인을 요청하자 당시 주독 대사관 문



김운경·재독동포 저널리스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