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채우며 살기 위해 광대의 길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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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채우며 살기 위해 광대의 길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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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3-24 17:02:44 | 수정 : 2011-06-07 12:5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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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탈한 ‘영세 연극인’의 삶이 좋아 40년 마당놀이 ‘윤문식 선생’의 삶
“이 썩을 놈아!” “이런 싸~가지 없는 놈을 봤나!”
신사적인 현대인의 표준어와 무관하게 입에 쩍쩍 들어붙게 감칠맛 나는 토속 사투리로 옴팡지게 한 바가지 욕설을 가득 내어뱉는 윤문식(66) 선생. 그의 물오른 연기와 몸에 밴 걸출한 입담, 구수한 너털웃음은 연륜 있는 마당놀이 연극인의 삶을 엿보게 해 정겹다. 파란 많은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기를 살아왔듯 그의 사투리 속에는 한 많고 정 많은 한국인의 정서가 녹아 있어 친근하다.

1943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서산농림고등학교를 거쳐 고향 후배며 동기인 최주봉, 박인환 등과 함께 1973년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했다. 1985년 손진택 대표가 이끄는 ‘극단 미추’ 단원으로 활동하며 1996년에는 제20회 서울연극제 연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같은 해 뮤지컬 ‘철부지’를 비롯해 연극 ‘둥둥 낙랑둥’,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울고 넘는 박달재’, ‘눈 물젖은 두만강’, ‘용병1998’, ‘구사일생’ 등을 무대에 올렸고, 2008년에는 ‘남사당의 하늘’을 통해 한국 연극 100년사를 기념했다. 그는 “문명은 돈으로 살 수 있지만 문화의 발전은 돈과 더불어 시간이 필요합니다. 화산이 폭발하여 농사를 지을 수 있는 1인치의 표토가 생성되기까지 1세기 100년이라는 세월이 걸리듯 우리 한국의 연극도 이제야 표토가 마련되었다고 봅니다”란 소감을 밝힌다. 가없는 어머니의 사랑으로 성장하다
“세수도 안하고 지저분해서 어릴 적 별명이 ‘만수’였어요. 마을에서 제일 지저분했던 거지 이름이 ‘만수’였는데 그 이름을 따다 붙인 거죠. 6·25 이후라 그 시절 애들은 다 그랬어요. 게다가 아버지가 한량이라 평양기생을 끼고 살며 할아버지 재산을 모두 탕진했죠. 정3품 함평 윤씨 가문에 시집온 어머니는 제 나이 일곱 살 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하루아침에 시장 터로 나앉는 처지가 되었어요. 그러니 생계를 연명하기 위해 장사 나간 어머니가 미처 돌보지 못한 아이들은 어땠겠어요. 땟국물 줄줄 흐르는 데다 행색이 꾀죄죄한 것이 당연 거지꼴이죠.”

2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항상 ‘장남 노릇’ 제대로 못해 죄송한 마음뿐이라고 말한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구김살 없이 낙천적으로 지내던 개구쟁이 소년이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는 반장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어머니의 뒷바라지와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회상한다.

“여자는 약해도 어머니는 강하다고 하잖아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양반집 마나님 체면을 다 걷어치우고 당시 아버지가 쓰던 책상을 이고 나가 시장판에 놓고 장사를 시작했어요. 평양기생이랑 그 식솔들을 데려다가 모두 먹여 살렸으니 집안 꼴이 뭐가 됐겠어요. 집안에 매두었던 기생 그네도 끊어내고 어머니는 오로지 4남매 공부시키는 데만 전심전력을 다했죠.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우리 남매는 학교도 제대로 못 마쳤을 거예요. 그러니 어머니의 존재가 얼마나 위대해요. 나는 어머니를 통해 우리 민족의 삶과 정신을 배우기도 합니다.”

미7사단 하우스보이 시절을 거쳐 기성 극단에 입성하다
그러나 그는 어릴 때부터 사람 많이 모인 곳을 좋아했고, 소위 ‘개구멍치기’를 통해 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을 보고 온 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을 다 모아 놓고 재연하는 데 남다른 재능을 보인다. 그중 가장 감명 깊게 본 연극이 <견우와 직녀>라는 여성 국극이다. 세상에 극단이 있다는 사실도 처음으로 알게 되던 시절이었다. 세상은 참으로 좁다고 하던가.

당시 연기력에 매료되었던 견우 역할의 여배우 박옥진 씨가 현재 같은 극단에서 활동하는 김성녀 중앙대 학장의 어머니기도 하다는 사실. 이후 윤문식 선생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연극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키운다. 그리고 학교에서 주최하는 소극경연대회에 참가해 대본 작성과 연극 연출은 물론 배우로 출연해 주목을 받게 된다. 당시 교장을 맡고 있던 황운선 선생은 서울에 있는 대학 연극과를 지망해보라고 권하기도 한다. 막연히 동경하던 배우의 삶이 보다 현실 가능한 꿈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는 고등학교 3학년에 진학한 후 대담하게 가출을 결행한다.

나름대로 고생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1년 동안 학자금을 벌어 대학에 등록금을 내기 위함이었다. 그가 고향 서산을 등지고 찾아간 곳은 다름 아닌 동두천 미7사단이다. 그곳에서 미군들의 구두를 닦아주고 잔심부름을 해주며 함께 동거 동락하는 하우스보이 생활을 하게 된다. 다른 친구보다 2년 늦게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평소 ‘나는 내 아들이니 널 봐주지만 남들은 네가 배우를 한다고 하면 뭐라고 하겠니’라는 어머니 말이 맞았어요.

시험 보러 가보니 대한민국 선남선녀들이 모두 모여 있더라고요. 촌에서 올라온 터라 풀이 죽어 그냥 포기하고 내려갈까 했는데 나와 비슷하게 촌스러운 최주봉, 박인환 두 사람이 있기는 거예요. 내 생각에 ‘저 쉬끼들이 들어가는 데 내가 왜 못 들어가나’ 해서 오기를 부리듯 용기를 내어 도전한 거죠. 나중에 알고 보니 공교롭게도 내 고향 2년 후배인 거 있죠. 학교를 다니며 나중에 알았어요. 그래서 우리 세 사람은 항상 잘 어울려 다녔어요. 그리고 ‘극단 가교’란 기성단체에서도 같이 활동했죠.”

아내의 내조로 연극인의 삶을 지속하다
그의 어머니는 항상 특별하지 않지만 ‘돈을 벌어서 남의 땅을 사지 마라’, ‘알뜰하게 살아라’, ‘상대방의 눈에서 눈물 흘리게 하지 마라’는 등의 일상적인 교훈을 하며 지내다 대학 졸업 무렵 세상을 떠난다. 이후 그는 뜨내기 생활을 하다가 교사로 재직 중이던 이영숙(2008년 사망) 여사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된다. 아내 덕분에 경제적으로 쪼들리지 않고, 가장으로서 크게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 가운데 연극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는 그는 아내에게 감사를 표한다.

“장인어른이 교장이었는데 처음에는 딸이 딴따라와 결혼한다고 하니 반대가 심했어요. 집안이 발칵 뒤집혔죠. 하지만 고등학교 3년 내내 반장을 한 사실을 알고 그 정도의 성실한 인격이라면 믿을 수 있다며 결혼을 승낙해 주셨어요. 만약 그때 마누라 만나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 했죠. 결혼 10년 동안 집사람의 내조가 없었다면 연극인생을 살 수 없었을 업니다. 집사람이 생활전선에서 뛰니까 내가 이렇게 활동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이어 그는 “어느 날 대학로 문예진흥원에서 <프란다스의 개>라는 연극을 연습하고 있을 때 집사람이 연습실에 찾아와 연극을 잠시 접고 부동산 중개업이 호황이니 2년만 그 일을 하면 어떻겠느냐 권하더라고요. 그래서 화감에 1층 시멘트 바닥으로 뛰어내려 크게 다친 적이 있어요. 이후 마누라는 절대로 연극하지 말라는 말은 안 하더라고요.” 그런 그의 아내가 지난 2008년 10월, 당뇨 합병증으로 15년간 앓던 병상을 떨치고 이 세상과 하직했다.

현재 그에게는 공대를 나와 LG 필립스에 다니는 아들 윤성범(32) 씨 하나만 집에 남아 있고, 아내를 대신해 집안에서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던 딸 윤을정(30) 씨는 숭실대학교 연구원으로 일하다 지난해 겨울 결혼을 했다. “딸이 지난해 결혼을 했어요. 제 엄마 죽은 직후라 미루자는 얘기도 있었는데 제 엄마도 결혼 날짜 다 알고 떠난 거라고 내가 밀어붙였어요.

사위 될 사람이 병원에 왔는데 아내가 병실에 못 들어오게 하고, 문을 반만 열어놓고 얘기하자 했어요. 장모될 사람 아픈 모습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거였지. 그래도 사위가 얼굴 뵙겠다고 들어간다고 하니 그에 못 이겨 병실 불을 끄자고 하더라고. 마누라는 침대 곁에 온 사위 손을 잡고 미안하다고 하데….” 담담하게 말하던 윤 선생이 눈물을 삼킨다.40년 마당놀이 인간문화재, 광대인생을 살다
윤문식 선생은 1968년 극단 가교 마당놀이 <미련한 팔자 대감>에서 돌팔이 의사 역을 맡아 데뷔를 했다. 이후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1984년에 마당놀이 <춘향전>에서 다시 무대에 섰다. 당시 조선일보 사장이 보러 왔다가 감명을 받고 소속 기자에게 ‘마당놀이 스타 윤문식’을 취재하라는 특명을 내림으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이를 계기로 그의 무명시절은 끝나고 마당놀이 역시 활성화가 되어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성공에 대해 말하면서도 ‘아직도 무명’이라고 대답하는 겸손함을 잃지 않는다. “인간이 살아가며 배를 채우긴 쉽지만 마음을 채우긴 어려워요. 마음이라는 것이 이 정도 채우면 되었다 싶다가도 자꾸 늘어나서 비우기가 쉽지 않죠. 마음은 욕심이 될 수 있고, 포부가 될 수 있고, 희망이 될 수 있어요. 그러나 솔직히 개나 돼지는 배를 채우며 살 수 있지만 인간은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어요.

나 역시 다른 거 다 비우고 마음을 채우며 살기 위해 광대의 길을 선택했죠. 그래서 그 길로 들어선 겁니다.” 그에게 있어 연극인생은 원망도 없고 좌절도 없다. 지나온 인생을 실패했다고도 생각지 않는다는 그다. 지나오며 힘들었던 상황에서 왜 이런 일이 있을까 생각은 하지만 결코 좌절이나 절망을 해본 적이 없다. 그것이 오늘의 그를 있게 해주었다는 결론이다.

“젊었을 때는 차비가 없어서 힘들었을 뿐이에요. 수유리에서 마포서관까지 거의 세 시간을 걸어서 가야만 했죠. 700~800 마디의 대사를 외우며 걸어갈 때도 배우로 들어선 것을 후회 한 번 안하고 달려왔어요. 그것이 외길 인생이죠. 다만 더욱 성숙해지고 인생을 다시 한 번 관조하게 되는 계기는 몇 번 있었어요. 어머니 돌아가셨을 대, 결혼했을 때, 첫아이 봤을 때, 그러나 어렵고 힘든 일은 너무나 많았지만 단언컨대 ‘내가 왜 이 길을 들어섰을까’ 후회해 본 적은 결단코 없어요.”

그런 그는 마당놀이, 연극, 영화, TV드라마, CF, 오락프로그램 게스트 등을 거쳐 만능 예능인으로 입지를 굳히게 된다. 그럼에도 ‘40년 연기 인생에서 앞으로 더 해보고 싶은 배역’을 꼽으라면 역시 돈 되는 상업적 연기보다는 소탈한 영세 연극이 좋다는 것이다. 트랙터로 농사를 짓는 사람은 땅을 손으로 만져가며 짓기에 다르다. 이처럼 영세 연극인도 직접 무대에 서서 관객의 호흡을 함께 느끼며 살기에 연극무대와 연극인생이 좋다는 그다.

다만 특별히 하고 싶은 배역이나 작품으로 희·비극을 두루 아우르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서양은 비극, 혹은 희극으로만 일관되게 진행한다. 희비쌍곡선을 그리는 것은 당연 한국이다. 그래서 합리적이고 다양하다. ‘돈이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도 우리 것’이라는 철학이 그에게 있다. 따라서 사람들의 마음을 울고 웃기는 ‘심봉사’ 같이 희비쌍곡선을 그리는 역할을 매우 좋아한다고 덧붙인다.

멀리 가려면 완급 조절하며 가야 한다
윤문식 선생은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맹진사댁 경사>를 쓴 희곡작가 오영진(1974년 사망) 선생을 손꼽는다. 과거 조만식 선생의 개인비서로 일한 적 있는 그는 일체 돈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후문이다. 너무 집이 가난하게 살기 때문에 주변 식자들이 대학 교수직을 권할 정도였다. 그러나 오영진 선생은 “작년에 가르친 것을 올해 또 가르치면 양심이 없다”는 말로 사양하고 물러섰다는 일화를 들려준다.

또한 윤문식 선생은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창극 <남사당의 하늘>을 든다. 19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린 작품으로 감명이 남다르단다. 보통 청소년들이 18세에 읽었던 <로미오와 줄리엣>을 세월이 흘러 다시 읽으면 느낌이 다르듯이 이 작품도 그렇다는 것이다. “옛날 극단 형태의 원조예요. 남사당에서 바우덕이란 여자가 꼭두쇠 노릇을 한 것은 일종의 혁명이죠. 리더는 무엇을 원하는지 다 압니다. 또한 무엇이 필요한지 알죠. 자신의 사리사욕을 버리고 단체와 조직원을 위해 몸을 바친 바우덕이가 인상적이에요. 많은 남자가 그를 거쳐 갔지만 남사당을 살리기 위해, 놀이판을 살리기 위해 헌신했어요.”

그러한 그는 현대인이 ‘바우덕이’란 여자를 보고 깨달았으면 하는 바가 있다고 덧붙인다. “우리 사회가 그렇다는 거죠. 이렇게 저렇게 어울려 사는 것이 남사당의 하늘을 보고 익혔으면 합니다. 바우덕이를 통해 전달하는 바를 깨달았으면 해요. 마당놀이는 일종의 스토리텔링이에요. 광대는 또한 스토리쇼이너고요. 그래서 광대가 스토리를 어떻게 전달하는지도 매우 중요하죠.” 그러면서 그는 ‘연기를 하는 배우가 변신을 잘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또한 너무 쉽게 무대에 오르는 것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한다.

“대학로에 무대가 100여 개가 넘어요. 그런데 요즘 연극은 보는 행위만 있어요. 개그맨들이 6개월 이상 못가는 이유가 감동이 없기 때문이듯 현재 배우들은 한국어를 몰라요. 연극에서 주어, 보어 강조하는 것이 각각 다른데 행위만 있고 감정이 없어요. 그래서 극단 연기는 종적이거나 횡적이기만 하죠. 모두 주인공을 하려 해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배우가 멀리 가려면 천천히 완급을 조절하며 가야 한다는 겁니다. 조급하게 서둘러서 가면 큰일 나요. 얼마 못가 주저앉게 되죠.”

씨줄과 날줄이 교차되어 한 필의 옷감을 짜듯 각기 처한 상황과 역할을 잘 수행하면 연극계가 지금보다 더욱 발전할 수 있다는 조언이다. 또한 함께 가는 균형을 익히면서 빨리 무엇인가 되려고 하는 조급함을 버리라고 충고한다. 배우라는 자신의 직업을 더욱 깊게 생각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정립하기 바란다는 것이다. 그러한 그는 오늘도 “인간성과 진실을 구현하는 배우가 되기보다는 단지 돋보이는 반짝 스타가 되기 위해 무대에 서는 아이들이 많아 문제예요.

화려한 이면이 있는 반면 어두운 그림자가 있어야 깊이 있는 배우가 됩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빨리 클 수 있을까 조바심을 치는 모습이 안타까워요. 나이 들어서까지 끊임없이 조명을 받으려면 자기 스스로 노력하는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하고, 스타가 되어서도 자신은 아직 멀었다는 겸손함을 가져야 합니다. 사회에서 유혹이 좀 많겠어요. 그래도 자신을 잘 견제하는 사람이 대성하죠.” 진심어린 기우를 나타내는 노당익장 연극배우 윤문식 선생의 말이다.


박구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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