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선덕여왕' '자명고' 등 사극드라마 열풍이 불면서 드라마 배경이 된 시대적 문화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여성들의 머리모양이다. 과거 우리나라 여성들은 숱 많고 윤기 있는 머리모양을 만들고자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을 모아 만든 큰 머리를 덧대기도 했다. 바로 가체다.
사극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가체가 등장하는 횟수가 많아졌지만, 대부분 가체는 진짜가 아니다. 국내에서 진짜 가체를 복원하고 만드는 데는 한 곳 뿐이다. 경기도 양평에 있는 민예공방이 그곳이다.
한국여성 美의 기준, 가체
우리나라에서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을 모아 머리 위에 덧대어 장식하는 풍속은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에는 여성들이 '다리(가체)'라는 가발을 사용했다는 구절이 있고 신라 여인들이 가발을 이용해 머리숱을 풍성하게 만들어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나타냈다는 내용도 나온다.
가체를 얹는 형식에 따라 머리모양도 다르게 불렸다. '트레머리(꼭뒤에다 틀어 붙인 머리모양)', '조짐머리(다리를 열 가닥으로 땋아 첩지끈과 함께 쪽을 지어 연결한 스타일)', '큰머리(예식 때 여성의 어여머리 위에 얹던 가발로 다리를 땋아 크게 틀어 올린 머리=떠구지머리)', 통일신라 때는 '아름다운 다리' 라는 뜻으로 '미체(美體)'라고 불리기도 했다.
머리에 가체를 얹는 풍습은 조선시대에 가장 성했다. 그런데 가체 구입비용이 지나치게 비싸지고 모양도 호사스러워지자, 영·정조 시대에는 가체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당시 포도청이 가체머리를 강하게 단속하여 순조 때 이르러는 기생을 제외한 거의 모든 여인의 머리모양이 쪽진 머리로 변했다.
가체는 유물로 남아 있는 것이 몇 점 안 되는데다 발견됐다 하더라도 단백질로 구성된 머리카락이 모두 녹아 발굴과 복원 자체가 힘들다. 그런 것을 민예공방에서는 어떻게 복원하고 있을까.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에 자리잡고 있는 민예공방. 이곳에는 40여 년 전부터 이어 내려온 가업으로 가체 만들기에 올인해 온 여성들이 있다. 광복 후 황해도에서 가족과 함께 서울로 피난 온 최봉임 선생을 시작으로 그의 딸 설경숙 선생이 가체만들기를 이어받았다. 최봉임 선생의 사망 후 가체복원사업은 설경숙 선생과 세 딸이 함께 하고 있다. 외할머니-어머니-세 딸... 3대에 걸친 여성들의 억척스럽고 강인한 전통이다.
최봉임 선생이 가체 만들기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1973년. 그때만 해도 좁은 집안 한 켠에서 머리다발들을 가지고 가체를 만드는 일이 생계를 넘어 평생 직업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최 선생은 먹고 살 길이 망막했던 터라 돈을 적게 받더라도 많은 물량을 만드는 데 열중했다. 하루종일 '쪽진 머리' 가체를 만들기 위해 한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몇 시간씩 앉아 작업을 하기 일쑤였다. 가체뿐 아니라 갓과 전립, 주립, 돼지털로 만든 벙거지 등 머리에 쓰는 것이라면 뭐든 닥치는대로 만들었다. 그렇게 몸을 구부리고 오랫동안 일하다 보니 2000년 경에는 숨을 거두기 전, 다리를 펴지도 못하고 거동이 어려울 정도에 이르렀다.
최 선생의 딸 설경숙 선생은 온화한 성품의 어머니 밑에서 아무리 물어도 자세히 가르침을 받다보니 가체의 뒤를 잇는 것은 당연시 되었다. 그러다 88올림픽 때 취타대, 의장대 등의 두식류를 대부분 만들었다. 그 덕분에 생계가 나아졌지만 설경숙 선생은 전통문화 보존을 위해 일을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큰딸 정소임 씨를 비롯해 소정, 소미 두 자매에게도 가체복원작업을 함께 하자고 권유했다. 세 딸은 엄마의 제안을 모두 흔쾌히 받아들였다. “어렸을 때는 하기 싫은 일이기도 했지만 늘 손으로 만지고 놀던 일이라 다시 배울 필요도 없이 만드는데 어려움이 없었다”는 게 소임 씨의 말이다. 88올림픽 이후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도 나아졌다. 이미 희소성 때문에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평가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큰머리 하나를 만드는 데도 섬세한 손길이 필요하다. 먼저 머리카락을 잘라서 묶은 뒤 땋는다. 여기에 댕기를 매고 움직이지 않도록 일일이 꿰매고 머리를 틀어 올리기까지 30번 정도의 공정이 간다. 그 긴 공정을 한 번에 끝내는 것도 아니다. 세 명이 각각 분업화하여 일을 한다지만 일을 하다 보면 온 몸은 녹초가 된다.
일에 빠져들다 보면 어깨와 팔에 온통 파스를 붙이고 침을 맞아야 할 정도로 몸이 힘든 게 사실이다. 하루 500개 정도 쪽을 지면 팔목이 잘 펴지지 않는다. 1천 개가 넘는 머리를 땋고 나면 팔과 다리가 덜덜 떨릴 정도란다. 그러나 이 일에 자부심을 느낀다는 이들은 "일이 없으면 오히려 불안하다"고 말한다.
주로 쪽 짓는 일과 작품을 외부에 알리는 일은 큰딸 소임 씨 몫이다. 가체 중에서 궁중의 큰머리 기방머리 등 머리를 잘 얹는 소정 씨와 머리를 잘 땋는 소미 씨. 어느덧 그들은 분업화된 하나의 공장처럼 각자 역할을 하며 자기만의 자부심도 느낀다.
그렇게 전문적으로 몰입하다 보니 이제 소임 씨와 동생들은 가체 모양만 봐도 어느 시대 스타일인지 쉽게 알 만큼 박사가 됐다. 머리를 땋기 전인 삼국시대인지, 조선 영·정조의 가체금지령 전후인지, 구한말 흥선대원군의 금지령 전후인지 구분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외할머니는 가체를 편의상 대감모자, 사또모자, 무당모자 등으로 불렀지만 이들은 달랐다. 가체에 사용되는 끈, 구슬 하나 하나의 명칭부터 찾아보기 시작했다. 각 소품들의 용도를 알게 되면서 가체를 만들기 위해 자잘한 소품부터 장식까지 얼마나 많은지 새삼 놀라게 되었다고 한다.
외할머니에게서 전해받은 것 말고 정자, 양태, 대우, 조영, 주렴, 매미 등 사소한 장식들도 이들의 손에서 이름을 얻고 다시 태어났다. 떨잠, 어염족두리 등 갓을 제외한 두식류는 모두 취급하는데 수백 가지나 된다.
가체도 문화재로 지정됐으면
벽화사진 한 장, 퇴색된 사진 한 장이 이들이 복원해내야 할 가체들의 유일한 단서다. 자료와 소재를 찾아 최대한 원본에 맞추려 노력하지만 자료가 희박한 경우도 많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예전부터 물려받은 것은 절대로 고수하자는 게 그들의 신념이다. 원단의 소재 하나도 바꾸지 않고 원형 틀 그대로 만든다. 색깔, 규율, 소재도 변해서는 안 된다는 게 철칙이다. 남자들이 쓰는 모자류의 머리부분을 만들 때도 여전히 할머니의 옛날 작업방식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이들은 전통무용 복식 두식류 재현, 벽화 속의 두식류 재현, 전통무용 머리 소품, 영화, 사극의 헤어스타일, 아트센터 전통공연에 쓰이는 가체들 중 55% 이상에 참여하고 있다. 파리 패션쇼, 명성왕후, 뮤지컬 대장금 등에도 함께 했다. 대학교에서 대수머리(왕비즉위식때 쓰는 머리) 강연, 운영궁에서의 복식제안, 강연제의 등의 바쁜 일정도 기꺼이 소화한다.
이들은 궁중의 가체들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길 바라며 노력도 기울이고 있다. 조만간 작품전도 열 계획이란다. 이후에는 민속박물관 같은 갤러리도 꾸며 사라져가는 전통가체를 사람들의 뇌리에서 살아있게 만들겠다는 게 이들의 꿈이자 포부다.
사극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가체가 등장하는 횟수가 많아졌지만, 대부분 가체는 진짜가 아니다. 국내에서 진짜 가체를 복원하고 만드는 데는 한 곳 뿐이다. 경기도 양평에 있는 민예공방이 그곳이다.
한국여성 美의 기준, 가체
우리나라에서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을 모아 머리 위에 덧대어 장식하는 풍속은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에는 여성들이 '다리(가체)'라는 가발을 사용했다는 구절이 있고 신라 여인들이 가발을 이용해 머리숱을 풍성하게 만들어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나타냈다는 내용도 나온다.
가체를 얹는 형식에 따라 머리모양도 다르게 불렸다. '트레머리(꼭뒤에다 틀어 붙인 머리모양)', '조짐머리(다리를 열 가닥으로 땋아 첩지끈과 함께 쪽을 지어 연결한 스타일)', '큰머리(예식 때 여성의 어여머리 위에 얹던 가발로 다리를 땋아 크게 틀어 올린 머리=떠구지머리)', 통일신라 때는 '아름다운 다리' 라는 뜻으로 '미체(美體)'라고 불리기도 했다.
머리에 가체를 얹는 풍습은 조선시대에 가장 성했다. 그런데 가체 구입비용이 지나치게 비싸지고 모양도 호사스러워지자, 영·정조 시대에는 가체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당시 포도청이 가체머리를 강하게 단속하여 순조 때 이르러는 기생을 제외한 거의 모든 여인의 머리모양이 쪽진 머리로 변했다.
가체는 유물로 남아 있는 것이 몇 점 안 되는데다 발견됐다 하더라도 단백질로 구성된 머리카락이 모두 녹아 발굴과 복원 자체가 힘들다. 그런 것을 민예공방에서는 어떻게 복원하고 있을까.

- 국내에서 진짜 가체를 복원하고 만드는 민예공방 3자매. 왼쪽부터 정소임, 소정, 소미 씨 ⓒ뉴스한국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에 자리잡고 있는 민예공방. 이곳에는 40여 년 전부터 이어 내려온 가업으로 가체 만들기에 올인해 온 여성들이 있다. 광복 후 황해도에서 가족과 함께 서울로 피난 온 최봉임 선생을 시작으로 그의 딸 설경숙 선생이 가체만들기를 이어받았다. 최봉임 선생의 사망 후 가체복원사업은 설경숙 선생과 세 딸이 함께 하고 있다. 외할머니-어머니-세 딸... 3대에 걸친 여성들의 억척스럽고 강인한 전통이다.
최봉임 선생이 가체 만들기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1973년. 그때만 해도 좁은 집안 한 켠에서 머리다발들을 가지고 가체를 만드는 일이 생계를 넘어 평생 직업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최 선생은 먹고 살 길이 망막했던 터라 돈을 적게 받더라도 많은 물량을 만드는 데 열중했다. 하루종일 '쪽진 머리' 가체를 만들기 위해 한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몇 시간씩 앉아 작업을 하기 일쑤였다. 가체뿐 아니라 갓과 전립, 주립, 돼지털로 만든 벙거지 등 머리에 쓰는 것이라면 뭐든 닥치는대로 만들었다. 그렇게 몸을 구부리고 오랫동안 일하다 보니 2000년 경에는 숨을 거두기 전, 다리를 펴지도 못하고 거동이 어려울 정도에 이르렀다.
최 선생의 딸 설경숙 선생은 온화한 성품의 어머니 밑에서 아무리 물어도 자세히 가르침을 받다보니 가체의 뒤를 잇는 것은 당연시 되었다. 그러다 88올림픽 때 취타대, 의장대 등의 두식류를 대부분 만들었다. 그 덕분에 생계가 나아졌지만 설경숙 선생은 전통문화 보존을 위해 일을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큰딸 정소임 씨를 비롯해 소정, 소미 두 자매에게도 가체복원작업을 함께 하자고 권유했다. 세 딸은 엄마의 제안을 모두 흔쾌히 받아들였다. “어렸을 때는 하기 싫은 일이기도 했지만 늘 손으로 만지고 놀던 일이라 다시 배울 필요도 없이 만드는데 어려움이 없었다”는 게 소임 씨의 말이다. 88올림픽 이후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도 나아졌다. 이미 희소성 때문에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평가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 왼쪽부터 소임, 소정, 소미 씨의 작업모습 ⓒ뉴스한국
큰머리 하나를 만드는 데도 섬세한 손길이 필요하다. 먼저 머리카락을 잘라서 묶은 뒤 땋는다. 여기에 댕기를 매고 움직이지 않도록 일일이 꿰매고 머리를 틀어 올리기까지 30번 정도의 공정이 간다. 그 긴 공정을 한 번에 끝내는 것도 아니다. 세 명이 각각 분업화하여 일을 한다지만 일을 하다 보면 온 몸은 녹초가 된다.
일에 빠져들다 보면 어깨와 팔에 온통 파스를 붙이고 침을 맞아야 할 정도로 몸이 힘든 게 사실이다. 하루 500개 정도 쪽을 지면 팔목이 잘 펴지지 않는다. 1천 개가 넘는 머리를 땋고 나면 팔과 다리가 덜덜 떨릴 정도란다. 그러나 이 일에 자부심을 느낀다는 이들은 "일이 없으면 오히려 불안하다"고 말한다.
주로 쪽 짓는 일과 작품을 외부에 알리는 일은 큰딸 소임 씨 몫이다. 가체 중에서 궁중의 큰머리 기방머리 등 머리를 잘 얹는 소정 씨와 머리를 잘 땋는 소미 씨. 어느덧 그들은 분업화된 하나의 공장처럼 각자 역할을 하며 자기만의 자부심도 느낀다.
그렇게 전문적으로 몰입하다 보니 이제 소임 씨와 동생들은 가체 모양만 봐도 어느 시대 스타일인지 쉽게 알 만큼 박사가 됐다. 머리를 땋기 전인 삼국시대인지, 조선 영·정조의 가체금지령 전후인지, 구한말 흥선대원군의 금지령 전후인지 구분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외할머니는 가체를 편의상 대감모자, 사또모자, 무당모자 등으로 불렀지만 이들은 달랐다. 가체에 사용되는 끈, 구슬 하나 하나의 명칭부터 찾아보기 시작했다. 각 소품들의 용도를 알게 되면서 가체를 만들기 위해 자잘한 소품부터 장식까지 얼마나 많은지 새삼 놀라게 되었다고 한다.
외할머니에게서 전해받은 것 말고 정자, 양태, 대우, 조영, 주렴, 매미 등 사소한 장식들도 이들의 손에서 이름을 얻고 다시 태어났다. 떨잠, 어염족두리 등 갓을 제외한 두식류는 모두 취급하는데 수백 가지나 된다.
가체도 문화재로 지정됐으면
벽화사진 한 장, 퇴색된 사진 한 장이 이들이 복원해내야 할 가체들의 유일한 단서다. 자료와 소재를 찾아 최대한 원본에 맞추려 노력하지만 자료가 희박한 경우도 많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예전부터 물려받은 것은 절대로 고수하자는 게 그들의 신념이다. 원단의 소재 하나도 바꾸지 않고 원형 틀 그대로 만든다. 색깔, 규율, 소재도 변해서는 안 된다는 게 철칙이다. 남자들이 쓰는 모자류의 머리부분을 만들 때도 여전히 할머니의 옛날 작업방식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이들은 전통무용 복식 두식류 재현, 벽화 속의 두식류 재현, 전통무용 머리 소품, 영화, 사극의 헤어스타일, 아트센터 전통공연에 쓰이는 가체들 중 55% 이상에 참여하고 있다. 파리 패션쇼, 명성왕후, 뮤지컬 대장금 등에도 함께 했다. 대학교에서 대수머리(왕비즉위식때 쓰는 머리) 강연, 운영궁에서의 복식제안, 강연제의 등의 바쁜 일정도 기꺼이 소화한다.
이들은 궁중의 가체들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길 바라며 노력도 기울이고 있다. 조만간 작품전도 열 계획이란다. 이후에는 민속박물관 같은 갤러리도 꾸며 사라져가는 전통가체를 사람들의 뇌리에서 살아있게 만들겠다는 게 이들의 꿈이자 포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