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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낙태 비범죄화’ 역사적 승리…한국도 변화 가능”

등록 2019-02-22 00:12:32 | 수정 2019-02-22 09:23:42

그레이스 윌렌츠, 21일 시민사회가 주최한 ‘낙태죄 위헌’ 토론회 참석
“여성이 직접 나서 낙태 경험 공유하며 토론에 참여해야…여성의 용기로 여론 변해”

21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변호사회관에서 '시민사회, 낙태죄 위헌을 논하다'는 제목의 시민사회포럼이 열렸다. (뉴스한국)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위헌 여부를 심리하고 있다. 형법의 낙태 처벌 조항인 269‧270조 위헌 여부를 판단한다. 오는 4월을 전후해 선고할 예정이다.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343개 단체가 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변호사회관 조영래홀에서 ‘시민사회, 낙태죄 위헌을 논하다’는 제목의 토론회를 열었다. ‘낙태죄는 위헌’이라는 전제로 그 논거를 살피고, 낙태죄 비범죄화 그 너머를 살펴보는 자리다.

이한본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변호사는 “우리가 주장하는 건 낙태를 범죄로 처벌하지 말자는 것이지 합법화하자는 건 아니다. 형벌 조항을 폐지하는 게 목적”이라며, “‘태아는 인간이 아니’라는 당연한 논리를 받아들이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태아의 생명이 없다는 게 아니라 법에서 태아를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말”이라며 “민법은 태아가 태어난 후에야 인간의 주체로서 사람이 된다고 말한다”고 설명했다. 태아는 헌법이 규정한 기본권을 향유하는 국민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한상희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헌재가 7년 전 낙태를 범죄로 규정한 현행법을 합헌으로 결정했지만 그 자체로 모순을 드러냈다고 꼬집었다. 한 교수는 “낙태죄를 합헌으로 본 건 태아의 생명권을 인정해 절대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인데 모자보건법은 성폭력 등으로 임신했거나 우생학‧유전적으로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낙태를 허용함으로써 모순을 드러냈다”고 지적한다.

또한 태아의 생명권이 임신부의 자기운명결정권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헌재가 생명권을 논외로 두고 자기운명결정권을 어떻게 제한할지 다뤘지만 두 권리의 성격과 존재 양상이 다르기 때문에 독립 존재로 인정하는 게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한 교수는 “태아에게 생명이 있다면 여성에게도 생명이 있다”며, “태아의 생명권으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대립할 게 아니라 태아의 생명과 여성의 생명을 대립해 봐야 한다”며, “경우에 따라서는 모체의 생명‧삶을 위해 태아의 생명권은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1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변호사회관에서 '시민사회, 낙태죄 위헌을 논하다'는 제목의 시민사회포럼이 열렸다. 맨 오른쪽이 그레이스 윌렌츠 국제앰네스티 아일랜드지부 조사담당관. (뉴스한국)
그레이스 윌렌츠 국제앰네스티 아일랜드지부 조사담당관은 “WHO(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낙태를 법적으로 제한하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여성이 원치 않는 임신을 하고 낙태를 할 가능성은 동일하다”며, “낙태의 법적 지위는 여성이 안전한 낙태를 할 수 있는지에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한다. 낙태를 범죄로 규정하면 불법 시술을 받는 경우가 많아 더 많은 비용이 들고 트라우마를 남길 수 있는데다 치료 시기도 늦어져 결국 여성의 삶과 건강에 불필요한 위험을 가한다는 지적이다.

아일랜드는 낙태를 한 여성을 최고 14년형에 처할 정도로 낙태에 엄격했지만 지난해 5월 25일 국민투표로 낙태를 금지하는 수정헌법 8조를 폐지하는 역사적 승리를 이끌어 냈다. 그간 이 조항 탓에 17만 명이 다른 나라에서 낙태를 하거나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여성이 인터넷에서 낙태약을 구입해 복용했다. 이제는 임신 초기 여성의 요청으로 낙태가 가능해졌다. 다만 의료인은 여전히 낙태 시술로 처벌을 받을 수 있다.

윌렌츠 조사담당관은 “1960년대부터 전 세계적으로 낙태죄를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없애는 추세이며, 1985년 이후 36개 이상 국가에서 관련 법을 바꾸었다. 심지어 낙태를 보건체계에 편입해 다른 보건서비스를 적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법률과 의료 기준에 따라 관할한다”고 설명한다.

이어 단순히 낙태 비범죄화가 낙태 접근성을 보장하는 데 충분하지는 않다고 지적하며, 법률로 낙태서비스에 접근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윌렌츠 조사담당관은 “임신 초기에 낙태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건 여성의 권리 침해를 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낙태 권리를 임시 초기로만 한정할 수는 없고 여성의 건강과 생명이 위험하다면 임신 기간과 상관없이 낙태를 허용하는 국가가 많고 이를 국제인권법이 보호한다”고 설명했다.

윌레츠 조사담당관은 “아일랜드 여성의 역사적 승리가 한국에서도 변화가 가능하다는 빛나는 교훈으로 이어지길 바란다”면서도 국민투표를 변화의 수단으로 추천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인권은 결코 투표로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아일랜드에서는 헌법을 개정할 수 있는 방법이 국민투표 외에는 없었다고 설명했다.

윌레츠 조사담당관은 아일랜드가 수정헌법 8조를 폐지하기까지 35년 동안 10번의 정권교체를 겪었다며, 변화를 이룰 기회를 쉽게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중요한 건 여성들이 직접 나서 낙태의 경험을 공유하며 토론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용기 있는 여성이 나서면서 여론이 변했다. 아일랜드 공영방송 조사에 따르면 국민투표에 참여한 43%가 지인의 경험이나 언론이 다룬 개인의 낙태 경험에 영향을 받았다고 응답했다”고 말했다.

21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변호사회관에서 '시민사회, 낙태죄 위헌을 논하다'는 제목의 시민사회포럼이 열렸다. (뉴스한국)
이날 토론회에서는 최명선 평등교육실현을위한전국학부모회 서울대표가 자신의 낙태 경험을 털어놓으며 현행 낙태죄의 불합리성을 드러내 주목을 받았다. 그는 “사회적으로 죄를 주지 않아도 생명을 잉태한 상황에서 낙태를 하면 스스로에게 죄를 준다”며, “정신적‧심리적‧육체적‧사회적 고통을 모두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고 말했다.

그는 “평소 존경하는 헌법학자로부터 ‘무분별한 낙태는 위험하다.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이를 숙고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낙태죄를 규정하는 법은 공적사회를 사유화하는 남성중심의 사고라는 것을 알았다. 자기 몸에서 숨을 쉬는데 누가 무분별하게 아이를 죽이고 싶겠나. 결국 우리가 겪는 느낌을 조금도 공감하지 않는 것”이라고 질타했다.

한편 토론회를 진행한 정강자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공동대표는 “낙태는 여성과 여성운동 진영의 문제만은 아니다. 나의 문제이고 우리의 문제라는 자각에서 낙태 유연성 논의의 장을 열었다”며, “토론회에서 논의한 내용은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등의 이름으로 4월 헌재에 의견서로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이슬 기자 dew@newshanku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