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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성노예 '피해' 넘어 '삶' 조명…'기록 기억' 전시회 개관

등록 2019-02-28 13:19:30 | 수정 2019-02-28 16:10:44

28일 오전 서울 도시건축센터서 개관식 열어
길원옥 할머니·박원순 서울시장 참석

28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도시건축센터에서 열린 '기록 기억' 전시회 개관 행사를 마치고 박원순(왼쪽에서 세 번째) 서울시장과 길원옥(왼쪽에서 두 번째) 할머니가 전시장을 둘러보며 김소라 서울대 정진성 연구팀 연구원의 설명을 듣는 모습. (뉴스한국)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서울 종로구에 있는 서울도시건축센터에서 '기록 기억: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다 듣지 못한 말들' 전시회 개관식이 열렸다. 정진성 서울대학교 교수 연구팀이 2015년 서울대 인권센터, 2016년~2018년 서울시 지원을 받아 미국과 영국 등에서 찾아낸 사료와 사진·영상 그리고 성노예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자리다.

전시회는 '성노예 피해자'라는 신분의 '피해' 그 자체에만 매몰하지 않고 역사의 물결 속 개인의 삶을 조명했다. 어느 지역으로 끌려가 어떻게 고향으로 돌아왔는지 혹은 미처 귀환하지 못한 삶은 어떠했는지 깊은 호흡으로 찬찬히 들여다본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간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의 스캔사진으로만 볼 수 있었던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실물사진 3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시회는 이달 25일 시작했고 내달 20일까지 이어진다. 전시를 마친 후에는 자료를 서울기록원으로 이관해 전시를 이어간다.

이날 오전 11시께 전시관 앞에서 간소하게 열린 개관식에는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길원옥(92) 할머니와 박원순 서울시장이 참여했다. 전시장 앞에 성노예 피해자들의 귀환 경로를 표시한 대형 지도가 있는데 두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피해자들의 넋이라도 귀환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귀환 경로에 배와 기차 모양의 스티커를 붙였다. 이어 박 시장은 길 할머니가 탄 휠체어를 밀고 다니며 함께 전시관을 둘러봤다.

일본은 1932년부터 1945년까지 전쟁을 일으킨 아시아·태평양 모든 지역에 일본군 위안소를 설치했고, 식민지·점령지는 물론 일본의 여성들을 소위 '위안부'로 끌고 같다. 피해자들의 이야기는 전쟁이 끝나고도 거의 반 세기가 지난 후에야 세상에 드러났지만 과연 우리는 이들의 삶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들었고 어떻게 기록했으며 앞으로 어떻게 기억할까. 전시회는 이런 고민과 과제에서 출발한다.

전시회는 피해자들이 끌려간 미얀마(옛 버마) 미치나·중국 텅충 및 송산·중부태평양 축섬(트럭섬)·오키나와 네 지역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미치나의 조선인 위안부' 관은 버마 북부의 작은 도시 미치나에서 성노예 생활을 하다 연합군의 포로가 된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버마는 당시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었고 수많은 위안소가 들어선 곳이었다. 이곳으로 끌려간 많은 조선인 성노예 피해자 중 일부는 일본이 전쟁에서 패할 때까지 방치되었다가 연합군에 붙잡혔다. 연합군은 이들의 존재를 기록하기 위해 사진을 찍고 심문했지만 그렇게 기록된 피해자 중 목소리를 낸 증언자는 없다.

전시관에는 당시 상황이 간결하면서도 자세하게 적혀 있다. 1942년 7월 10일 4000t급 연락선이 군함 7척의 호위를 받으며 부산항을 출발했다. 이 배에는 조선인 여성 703명과 위안소 업자 약 90명이 타고 있었다. 여성들은 "돈 많이 벌고 좋은 데가 있으니 가지 않을래?"·"데이신따이(정신대)로 가서 6개월만 일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돈을 많이 주는 식당에 가려는데 너도 안 가겠니?"·"일본 병원에서 훈련과 교습 받고 간호원 노릇한단다"·"고운 옷 입고 공장에 취직하게 해줄게"·"따라가면 하얀 쌀밥에 고기반찬 해주고 좋은 옷 입혀줄게"라는 말에 속아 따라나섰다고 했다.

이 배가 4차 위안단을 태우고 출발한다는 사실을 아는 건 일본군과 업자뿐이었다. 이 사실은 2013년 버마 위안소 관리의 일기가 발견되면서 확인할 수 있었지만 1차~3차 위안단의 이야기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배는 타이완에 들러 여성들을 더 태우고 싱가포르까지 갔고, 그곳에서 조선인 여성들은 다른 배로 갈아타고 버마 랑군항으로 향했다.

배가 랑군항에 도착한 건 출발 한 달 열흘 만인 그해 8월 10일이다. 그곳에서 여성들은 여러 조로 나뉘어 군용 트럭을 타고 알 수 없는 곳으로 이동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에야 이들은 자신이 성노예가 된 사실을 알았다. 미치나에는 총 4개의 위안소에 63명의 성노예 피해자가 있었다. 조선인 여성이 42명·중국인 여성이 21명이다. 학교 건물을 탈취해 개조한 위안소의 이름은 교에이·간수이·바쿠신로·모모야였고 일본군은 성노예 피해자들에게 독방을 배정했다.

1944년 연합군이 반격을 시작했고 미치나도 공격했다. 도시가 점령될 위기에 처하자 업자들은 피해자들을 데리고 미치나를 탈출했다. 전투가 벌어진 혼란한 상황에서 조선인 피해자 한 무리는 일본군을 따라갔고, 다른 조선인 여성 20명과 일본인 업자 2명은 와잉마우라는 작은 마을에 남겨졌다가 1944년 8월 10일 연합군의 포로가 됐다. 여성들은 미치나 서쪽 비행장에 마련한 임시 포로 수용시설에서 5일 동안 머물며 미군의 심문에 응했다.

이후 미군은 여성들을 인도 북동부 레도 수용소로 보내 20일 동안 상세하게 심문하고 그 내용을 보고서로 기록했다. 심문이 끝난 후 이들은 인도 뉴델리 데올리 수용소로 이동했다. 1945년 8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들은 연합군 포로 수용소에 계속 갇혀 있었다. 조선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었고 연합군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었다. 1946년 5월 17일 인도 카라치에서 연락선이 출항했는데, 기록에 따르면 여기에는 조선인 여성과 아이 24명이 타고 있었다. 이들이 미치나에서 붙잡힌 성노예 피해자들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인도에 조선인 민간인이 많지 않았던 점을 고려하면 이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정진성 교수 연구팀의 판단이다.

'텅충·송산 전투와 위안부' 관은 버마와 접경지인 중국 윈난성 송산과 텅충의 전장에서 살아갔던 성노예 피해자들의 삶을 생존자 박영심의 증언으로 조명했다. '종군위안부 및 태평양전쟁 피해자 보상대책위원회'가 1995년에 발간한 '짓밟힌 인생의 외침'에서 박영심은 "지옥 같은 금수로 위안소(난징 위안소)에서 약 3년간 있다가 일본군 병사 2명의 호송을 받으면서 상해를 거쳐 먄마(미얀마) 랑군 부근의 라슈(라시오) 위안소에 끌리워갔다…라슈 위안소에서 치욕스러운 2년간의 세월을 흘려보낸 후 나는 다시 먄마 중국 국경 지대인 마쯔야마(송산)로 끌려갔는데 그곳은 최전선 지대였다. 매일 수많은 폭탄과 포탄이 날아와 터졌다"고 증언했다.

정진성 연구팀은 1944년 8월경 송산에는 박영심을 포함한 성노예 피해자 24명이 위안소에 머물렀다고 추정한다. 약 50일 간의 접전 끝에 일본이 중국과 미국에 패하면서 그해 9월 8일 전투가 끝났지만 피해자 일부는 생존해 탈출하고 일부는 연합군에 구출되고 일부는 사망했다. 폐허가 된 송산에서 살아남은 여성 4명과 중국군 병사 한 명을 미 육군이 촬영했는데, 박영심은 당시 임신 중인 모습으로 찍혔다. 이후 박영심은 사산했다고 알려졌다.

전투가 끝나고 살아남은 23명의 성노예 피해자들은 중국군의 포로가 되어 쿤밍 포로 수용소에 모였다. 수용자 명단에는 전라북도·경기도·평안남도·평안북도·경기도·황해도 등에서 온 이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이들 중 10명이 송산에서 왔고 13명은 텅충 위안소에 있었다. 쿤밍수용소에 있던 23명 중 박영심과 윤경애 둘 만이 세상에 나왔다. 윤경애는 "우리들은 피가 고인 참호 속에서 우연히 살아남았다"고 했고, 박영심은 "나의 불우한 과거를 생각할 때 나와 같이 끌려가 갖은 고욕 끝에 이국땅에서 무주고혼이 된 수천 명의 조선녀성들이 생각난다"고 말했다. 박영심은 2000년 12월 일본 도쿄를 찾아 여성국제전범법정에서 증언했다.

이와 함께 '트럭섬 사진이 말을 걸다:이복순과 축섬의 조선인 위안부' 관은 아시아·태평양 전쟁 중 중부태평양 축섬에서 성노예 생활을 강요받다 살아 돌아온 여성의 이야기를 담았고, '오키나와의 위안부와 전쟁의 상흔'관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최초 증언자인 배봉기와 그를 기억하는 오키나와 사람들을 전시했다.



이슬 기자 dew@newshanku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