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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세 할머니 피아니스트 아르헤리치, 여전한 활화산

등록 2019-05-08 17:21:45 | 수정 2019-05-08 23:35:23

임동혁 & 마르타 아르헤리치. (크레디아 제공=뉴시스)
‘휴화산이 되지 않았을까’라는 걱정은 말 그대로 기우에 불과했다. 열정적인 연주로 활화산이라는 별칭을 단 아르헨티나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78)는 건재했다.

7일 밤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자신이 적극 지지하는 피아니스트 임동혁(35)과 들려준 라흐마니노프의 교향적 무곡에서 식지 않은 열정과 기교를 뽐냈다.

라흐마니노프가 ‘춤곡’을 소재로 교향곡의 구성에 맞서는 심오한 구성의 작품이다. 특히 이 곡을 관현악뿐만 아니라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연주하기 위해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버전도 함께 만들었는데, 이날 이 버전이 연주됐다.

곳곳에 생명력이 넘실대는 1악장부터 아르헤리치는 분위기를 쥐락펴락했다. 예전의 타오르는 피아니즘 대신, 질주하는 임동혁의 타건을 결연한 관조의 시선으로 여유롭게 받아들이면서 명료하고 단호한 음색을 들려줬다.

2악장 후반부의 몰아치는 부분에서는 ‘고요한 굉음’이라는 추상적인 실체를 목도하게 만들었다. 3악장에서 은연중에 풍기는 라흐마니노프의 죽음의 냄새를 승화시키는 희망의 광선 같은 그녀의 타건은 ‘건반위의 여제(女帝)’로 통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 라흐마니노프 교향적 무곡의 ‘2대의 피아노를 위한 버전’은 임동혁이 최근 워너클래식 레이블을 통해 발매한 정규 5집에도 실렸다. 역시 아르헤리치가 협연했다. 라이브로 두 사람의 연주를 감상한 청중은, 레코딩과 비교하는 재미가 있을 법하다.

이날 아르헤리치의 연주는 재작년과 작년에 내한공연한 러시아 피아니스트 엘리소 비르살라제(77)를 떠올리게 했다. 두 거장 피아니스트는, 노장 연주자의 연주는 기교보다 연륜이라는 편견을 산산조각냈다.

나이는 물론 ‘여류’라는 수식 등의 비교급을 굳이 매기지 않더라도, 어떤 피아니스트들보다 에너지를 분출하고 현재 진행형으로 진화하는 활화산 같은, 보물 같은 연주자들이다.

임동혁 & 마르타 아르헤리치. (크레디아 제공=뉴시스)
비르살라제가 독주회였던 반면, 아르헤리치의 연주는 독주회가 아니어서 직접적인 비교가 힘들기는 하다. 하지만 비르살라제의 타건이 거침없이 광포했다면, 아르헤리치의 타건은 서서히 타오르다 번쩍하는 광선 같았다.

거장이 유행을 타지 않는 고전으로 승화되는 순간이자, 견고하게 구축된 피아니즘은 세월의 물살에 휩쓸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무대다.

아르헤리치의 무대는 국내에서 좀처럼 보기 힘들다. 건강 등의 이유로 여러 번 취소돼 ‘캔슬의 여왕’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번 내한도 9년 만이었다. 그녀가 무대 위로 입장할 때부터 K팝 아이돌 이상의 환호가 객석으로부터 우렁차게 솟아나왔다.

이러니 한국 클래식업계의 축제일 수밖에 없다. ‘건반위의 여제’를 흐뭇하게 바라본 ‘바이올린 여제’ 정경화를 비롯, 피아니스트 김정원,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 서울시향 강은경 대표 등이 객석에 앉았다. 클래식 음악 팬으로 알려진 박찬욱 감독도 공연장을 찾았다.

공연 이름에도 ‘벳부 아르헤리치 뮤직 페스티벌’을 달았다. 다른 연주자와 무대 위에서 함께 하는 것을 즐기는 아르헤리치가 여는 축전으로 세계적인 거장과 젊은 음악가, 음악애호가의 ‘만남의 장’이다.

특히 1부가 그랬다. 아르헤리치와 임동혁이 플루티스트 최나경, 서울시향의 수석 단원들과 함께 한 생상의 동물의 사육제는 위트가 넘치는 무대였다. 프로듀서, 공연 해설자이자 아르헤리치의 딸인 아니 뒤투아의 프랑스어 내레이션이 곁들어졌다.

‘아르헤리치 벳부 페스티벌 인 서울’. (크레디아 제공=뉴시스)
그녀가 ‘피아니스트’ 부분에서 어머니의 백발을 만지며 “얼마나 우스운 동물인가. 예술가라 할 테지”라고 말한 뒤, 아르헤리치가 우아하게 당황스러워하는 부분은 잘 늙어가는 ‘거장의 품격’이 무엇인지 보여줬다. 보통 어린이를 위한 음악회에서 자주 연주되는 동물의 사육제는 곳곳의 유머가 세련되게 승화하며 ‘어른을 위한 동화’로 읽혔다.

바이올리니스트 임가진·김덕우, 비올리스트 강윤지, 첼리스트 심준호 등 서울시향 수석끼리 들려준 하이든의 현악사중주 ‘종달새’는 이날 공연의 문을 여는 신호탄으로 제격이었다.

아르헤리치는 앙코르 곡으로 임동혁과 함께 모차르트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3악장을 들려줬다. 그녀의 견고한 터치는 시간이 지나도 흔들림이 없었다.

아르헤리치에 대한 기록은 세월의 흐름과 상관없이 유효할 것이다. 거장을 보면서 삶의 멜로디와 리듬을 어떻게 스케치해나갈지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노장의 좋은 연주는 삶에 대한 고민으로 수렴된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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