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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너를 만나다’·‘산책하는 침략자’…SF연극 주목 받네

등록 2021-09-16 08:53:15 | 수정 2021-09-16 08:58:03

연극 ‘지정’. 2021.09.15. (황선하 제공=뉴시스)
인간처럼 골고루 일을 수행하는 범용 인공 지능(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이 사람의 인지신경을 조절하는 가까운 미래. 이를 정신상담 분야에 적용한 ‘AGI 정신과의사’가 상용화된 시대다.

영화 전공생인 ‘제니’는 세계적 영화제를 목표로 작업해가는 과정에서 AGI 정신과의사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심리를 조절한다. 극에선 이 행위의 시작점을 ‘지정’이라 일컫었다. 스트레스나 괴로움의 요인을 ‘지정’해 없애는 것이 가능하다는 설정이다.


최근 공연한 연극 ‘지정 셀프-데지그네이션(Self-Designation)’(9월 3~5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 극장1)은 SF를 동시에 좋아하는 연극 팬들 사이에 화제가 됐다. 독특한 설정에 “AGI의 도움을 받게 되면, 인간으로서 문제해결 능력을 잃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등의 진지한 논의가 이어졌다.

연극 ‘지정’을 쓴 장우재 작가는 역시 쓰고 연출까지 한 전작 ‘싯팅 인 어 룸’에서도 멀지 않은 미래를 다뤘다. 심각해진 팬데믹 상황 이후에도 살아남은 ‘지니’가 주인공으로, 빅데이터 시대에 온라인에서 잊혀질 권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디지털 장례’가 중심 소재였다. 결국 연극 자체가, 인간의 근원에 대한 물음이었다.

‘지정’ 역시 괴로움과 스트레스를 잊고 싶다는 인간적 욕망과 그것을 어떻게든 이겨내고 싶다는 인간적 바람이 내전을 벌이면서, 인간의 지정학(地政學)적 영토는 어디까지인지를 탐색했다.

무대를 비워냄으로써 많은 질문을 채운 박정희 극단 풍경의 세련된 연출, 콘셉트 어드바이저로 나선 장재키 JMI신경과학예술원장의 조언으로 탄탄한 완성도를 자랑했다. 이호재, 황은후, 나경민 등 배우들도 호연했다.

‘지정’과 ‘싯팅 인 어 룸’ 외에도 올해 SF 연극 여러 편이 올랐다.

지난달 공연한 크리에이터 그룹 ‘프로젝트 밈’의 융복합 콘텐츠 ‘너를 만난다’는 ‘관객 참여형 SF 스릴러’를 표방했다. 알 수 없는 감염병의 위협을 받는 가까운 미래. 안드로이드가 인간을 살해하고 인간인 척 신분을 속이려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색출하고 재판하는 심리 게임에서 관객은 제공된 개인 기기(태블릿)를 통해 공연에 직접 참여했다.

연극 ‘너를 만나다’. 2021.09.15. (프로젝트 밈 제공=뉴시스)
최근 재연한 창작집단 LAS의 연극 ‘산책하는 침략자’는 잘 만들어진 SF 멜로 드라마였다. ‘칸 국제 영화제’에 초청됐던 일본 구로시와 기요시 감독의 영화 ‘산책하는 침략자’(2017)의 원작 희곡.

지구정복이 목표인 외계인들이 사람들의 특정 개념을 빼앗는 이야기. 외계인은 복잡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빼앗은 뒤 속절없이 무너져 펑펑 운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산책하는 침략자’는 이런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SF적인 요소로, 사랑의 본질적 감정을 깊게 파고들었다. 사랑에 대한 완벽한 연극적 실험이다.

지난 4월과 5월 국립극단에서 공연한 ‘액트리스 원: 국민로봇배우 1호’과 ‘액트리스 투: 악역전문배우’는 성수연의 1인극으로, 미래 연극 무대의 ‘로봇 배우’를 가정했다.

하루가 다르게 AI가 일상화되며 급속히 진보하는 기술사회 속에서 과연 ‘인간다움’과 ‘예술’의 본질은 무엇인지, 질문을 던졌다. ‘햄릿’을 패러디한 대사 “켜느냐 끄느냐, 그것이 문제로다.”(Power on or power off, that is the question.)가 핵심 화두였다.

SF 장르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실험군을 자유롭게 설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소 비현실적인 상황이더라도 SF니까 통용되는 상황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SF라는 장르적 장치는 미래에 대한 전망보다, 현재의 한계를 톺아본다. 지금이 가닿지 못하는 상황을 빌려, 도리어 현재를 분명히 인식하게 만든다.

연극 ‘산책하는 침략자’. 2021.08.05. (창작집단 LAS·IRO 컴퍼니 제공=뉴시스)
‘지정’의 박정희 연출은 “SF는 인간의 변형이 화두다. 연극은 가장 인문학적인 메시지를 갖고 있는데 그 인문학이 던지는 질문을 시대에 맞게 변형할 수 있는 것이 SF”라고 말했다.

그간 한국 공연계에 SF 장르물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소극장 혜화당이 꾸준히 SF연극 페스티벌을 열어왔다. 작년엔 SF 작가 김보영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연극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가 공연했다.

하지만 아직 비교적 다른 장르에 비해 작품 수가 현저히 작다. 올해 초 영화 ‘승리호’가 한국형 SF 영화의 물꼬를 터준 것처럼 공연계에서도 시대 흐름과 맞물려 좋은 SF 작품이 잇따라 제작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크다. ‘지정’ 같은 작품이 그 흐름에 있다.

무엇보다 다른 공연이 아닌,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 그리고 영화 등 볼거리가 많은 시대에 관객을 불러 들려야 하는 공연계의 고민과도 SF는 맞물려 있다. SF의 화려한 무대나 기술의 속성이 아닌, 철학적인 속성을 연극이 적극 품에 안는 이유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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